촛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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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는 무엇입니까?

생각하고 회개하여 가지라!(계 2 : 1 ∼ 7)

날짜 : 2015. 07. 19 글쓴이 : 이성우

: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 :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 :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 :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 :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각이 몸인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 . 우리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소원합니다 .

요즘 , 일과 후에 몇 차례 광교산을 산보하였습니다 . 사무실에서 출발하여 , 영동고속도로 밑을 지나자마자 오른 쪽으로 붙어 , 거북바위로 해서 , 한철약수터 , 약수암을 빙 돌아오는 길입니다 . 빠른 걸음으로 숨이 턱에 차도록 걷습니다 . 걷다보면 그래도 생각할 것이 보입니다 .

산등성이로 난 큰 길을 걷다가 ‘ 길 ’ 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 산등성이 숲속으로 난 길은 넓기도 하지만 풀 한 포기 없는 신작로 입니다 . 사람이 제법 많이 다녔다는 증거입니다 . 그 길도 처음에는 풀이 우거진 산등성이었을 것입니다 . 한 사람 두 사람 다니다보니 오솔길이 만들어졌습니다 . 길이 만들어지니 더 많은 사람들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다니다 보니 손이 필요하여 어느 기관에서 관리하는 듯합니다 . 깨끗하게 관리 한 흔적이 있습니다 . 그래서 다니는 사람이 더 많아 졌습니다 .

그런데 길이 나고 더 많은 사람이 다닌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닙니다 .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녀서 산림이 파괴됩니다 . 그래서 산림휴식년제 를 도입하여 다니지 못하게 막은 길도 있습니다 . 다니지 말라는 표지판을 세웠습니다 . 그런데 이것으로 안 되어 줄을 쳐서 막았습니다 . 하지만 그것을 끊어버리고 계속 다니는 길도 있습니다 . 다니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 그래서 무지막지하게 나무를 쌓아 방어벽 을 만든 곳도 있습니다 .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어떤 사람은 길을 개척하고 만듭니다 . 이 세상에는 인생의 오솔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앞서 간 길을 열심히 따라갑니다 . 많은 사람이 다닌 길이라면 안심이 되고 편안합니다 . 문득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남들도 다 하는 짓이라면 애써 위안을 삼습니다 . 그런데 정말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 세상에는 문이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으나 ‘ 멸망으로 인도 하는 문 ’ 이 있습니다 . 그러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으나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 이 있습니다 ( 마 7:13 ∼ 14).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

길을 보면서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 그냥 열심히 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 어느 것이 좋은 산보인지 잘라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 그러나 한번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 한번쯤은 길섶의 이름 모르는 풀 한 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고 따라다니면 잘못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

우리는 교회의 길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 이 땅의 교회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 다른 교인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따라가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오늘 말씀은 “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5a) 고 경고합니다 . 교회에 대하여 생각하고 회개하여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 1 절 말씀입니다 .

: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

밧모섬의 요한은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 는 음성을 듣습니다 . 이 말씀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내용입니다 . 에베소라는 도시는 신약성경의 한 책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 에베소는 그 당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 로마제국 안에서 로마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라고 할 정도입니다 . 인구와 규모면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 이곳은 아시아와 유럽 , 아프리카를 잇는 문명과 교역의 교차로 였습니다 . 로마제국 안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 하지만 부요의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있었습니다 . 이곳에는 세계 7 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Artemis) 신전이 있었습니다 . 아데미 신전은 현재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 배나 더 컸습니다 . 더욱이 아데미 여신 은 가슴 (?) 많습니다 . 그만큼 음탕하기도 하였습니다 . 지금 에베소 유적지에는 셀수스 도서관의 유적 이 있습니다 .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은 도시답게 충성심을 보여야 했습니다 . 이곳은 로마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 도미시안 황제의 신전 유적이 웅장합니다 . 엄청난 규모를 보여주는 당시의 로마식 원형경기장 이 남아 있습니다 .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로마화 된 도시 였습니다 .

에베소에 복음이 처음 증거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였습니다 . 사도 바울이 2, 3 차 전도여행 중에 방문하였습니다 . 이 지역에 2 년 간 머무르며 목회하기도 하였습니다 . 디모데가 바울을 이어 교회를 섬김으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세 번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행 19 장 , 딤전 1:3). 사도 요한도 이곳에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 요한에게 남다른 애착이 있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향한 말씀의 첫 번째 내용은 무엇입니까 ? 먼저 2 절 말씀입니다 .

: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첫 번째 내용은 그들의 행위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 여기에서 알다 [ eijdw / 에이도 ] 는 말은 ‘ 보다 ’ 는 뜻이 있습니다 . 즉 , 보아서 안다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눈여겨보셨습니다 .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셨습니다 . 여기에서 행위 [ e[rgon / 엘곤 2041] 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 그것은 그들의 수고의 행위와 인내의 행위였습니다 . 그들이 한 수고의 행위 는 무엇이었습니까 ?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 그들은 영적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거짓된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그들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 또 에베소 교회에는 인내의 행위 도 있었습니다 . 그것은 ‘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 ’ 입니다 . 악한 자들이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 이미 교회에 들어와 있는 자칭 사도라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 이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드러내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였습니다 . 거짓을 밝히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 그들은 거짓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 이미 들어와 있는 거짓을 밝혀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 이것은 참으로 잘한 것이었습니다 .

에베소교회의 칭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 3 절 말씀입니다 .

: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

이것은 2 절 말씀에서 수고한 행위와 인내한 행위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 그들은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참았습니다 . 견뎠습니다 . 그리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 당시 사회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 당시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성육신 , 하나님께서 사람 되신 분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붙잡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런 신앙을 지켰습니다 . 이런 신앙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

그리고 에베소교회는 지금도 잘하고 있고 , 앞으로도 계속하여 지켜가야 할 훌륭한 점이 있었습니다 . 6 절 말씀입니다 .

: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여전히 잘 하고 있고 , 앞으로 계속하여 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 그것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 니골라 당은 니골라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 이들은 구약의 사악한 선지자였던 발람의 행위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니골라 당에 대하여 다음에 다시 살려볼 것입니다 .) 에베소 교회가 미워하는 니골라 당을 주님께서도 미워하신다고 하십니다 . 지금까지 그렇게 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하여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이 한 일들을 지지해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 주님은 그들을 보고 계십니다 .

이상에서 살펴 본 말씀을 통하여 , 에베소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

1. 주님께서 알고 계심을 생각 하여야 합니다 .

누군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은 ‘ 망각 ( 忘却 )’ 이라고 했습니다 .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쌓여있다면 우리는 곧 미쳐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 잊는 것도 복입니다 . 그런데 또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에게서 ‘ 잊힘 ’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 사람들이 기를 쓰며 자기가 한 일을 내세우는 이유는 한마디로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그렇게 떠버리고 자랑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사람들은 이름을 내려고 애를 씁니다 .

오래 전 , 성지 순례 중에 이집트의 시내 산에 올랐습니다 .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으로 알려진 그 산입니다 . 그런데 그 꼭대기 바위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 한글로 새겨놓은 이름을 보았습니다 . 수원 아무개 교회라는 교회 이름과 함께 !

그런데 그렇게 자기 이름 알리려고 힘쓸 필요 없습니다 .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한 일을 다른 교인들이 몰라준다고 해서 그렇게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 주님께서 분명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 착한 일하고 나서 마음 상하고 삐치기 없기입니다 .

이런 우리를 아시기에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

“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 마 10:42)

주님께서 모든 것을 기억하여 주심을 알기에 믿음의 행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격려의 말씀이기도 하지만 또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 주님은 촛대는 무엇입니까? 수고로운 행위나 인내의 행위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 4 절 말씀입니다 .

: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 그러나 [ ajlla / 알라 ]’ 라고 말씀의 흐름을 바꾸십니다 . 물론 6 절에서 ‘ 오직 [ ajlla / 알라 ]’ 이라는 말로 그들을 계속해서 지지해주십니다 . 하지만 그들에게는 칭찬 받아야 할 행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그들에게는 책망 받아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 여기에서 책망하다 [ kata / 카타 ] 는 말은 지금까지 칭찬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일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는 칭찬받을 그 많은 행위뿐만 아니라 , 책망 받아야 할 일도 보셨습니다 . 쌀을 씻으면서 뉘를 골라내고 , 돌을 골라내듯이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의 잘못한 일을 책망하십니다 . 잘한 것은 잘 한 것이지만 ,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주님께서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 그것은 그들이 처음 사랑 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 처음 사랑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가졌던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여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버리다 [ ajfivhmi / 압히에미 ] 는 말이 심각합니다 . 이것은 보내다 , 쫓아내다는 뜻입니다 . 이것은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 에베소 교회는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고 정작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엷어졌습니다 . 교회에서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여 내느라고 형제를 의심하였습니다 . 그래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 뜨거워야 할 가슴까지 식었습니다 .

그 심각성을 우리는 5 절 후반절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

: 5b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만약에 촛대는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깊이 생각하고 다시 돌아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극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 안타깝게도 에베소교회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 터키에 있는 에베소 유적지는 완전히 폐허입니다 . 에베소라는 도시전체가 황폐하여졌습니다 . 지진이 나서 일천 수백 년 동안 완전히 땅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 오랫동안 에베소라는 도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 1863 년에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고작 15% 정도 발굴하였습니다 . 지진으로 묻혀있던 것이 조금씩 드러나며 그 거대한 면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 안타깝지만 그것으로 에베소교회의 역할도 끝이 났습니다 . 주님의 심판은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그들은 그들이 들어야 할 책망을 듣지 않았습니다 .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 정리할 두 번째 내용입니다 .

2. 주님의 책망을 듣고 회개 하여야 합니다 .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를 향한 엄중한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 사랑이 식은 교회는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 세상에도 버림받습니다 . 에베소교회는 분명히 처음에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으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거짓 교사들을 막아내고 드러내어 밝히는 일을 하다 보니 사랑이 식어졌던 것입니다 . 다른 일에 열중하다가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

“ 보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 는 말이 있습니다 . ‘ 무주의맹시 ’ 입니다 . 다니엘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의 실험입니다 .

흰색 셔츠를 입은 팀 3 명과 검은 색 셔츠를 입은 팀 3 명 등 총 6 명이 동그랗게 모여 서로 농구공을 패스합니다 . 실험 참가자에게 흰 색 셔츠 팀의 패스 횟수만 세라고 합니다 .

실험에서 고릴라 옷을 입은 학생이 천천히 등장해 카메라 정면을 보고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드린 뒤 퇴장합니다 . 흥미로운 사실은 실험 참가자의 50% 가 고릴라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 흰색 셔츠 팀의 패스 횟수를 세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패스 이외의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 심리학 실험으로 유명한 ‘ 보이지 않는 고릴라 ’ 실험입니다 .

교회인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조금씩 여러 가지 일에 바빠지면서 그 중요한 일을 잊습니다 .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일부러 버렸겠습니까 ? 아닙니다 . 그들은 밖에서 들어오는 이단을 막아내느라고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였습니다 .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하여 서로 의심하였습니다 . 결과적으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 하지만 더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

한 때 , 어떤 이단이 교회에 일부러 들어와서 ‘ 산 옮기기 ’ 라나 , 교인을 뭉텅이로 빼내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 그러다 보니 새로운 교인이 등록을 해도 “ 저거 혹시 ○ 천지 아니야 ?” 하는 의심이 생겨서 이상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 그러다가 제가 회개하였습니다 . 그리고 어떤 사람이라도 그냥 사랑으로 품기로 하였습니다 . 그 이단의 가장 큰 폐해는 교인을 빼내가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 우리가 말씀에 굳게 서서 ,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면 어떤 이단도 이길 수 있습니다 .

교회다움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 세상이 어수선하고 , 거짓이 횡행하고 , 불법이 극성을 부리기에 사랑이 위축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 마 24:12 ∼ 13]

하나님의 사랑 받은 여러분 ,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우리의 삶에서 정의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사랑 역시 포기할 수 없습니다 .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 오늘 말씀이 주시는 핵심 내용이 여기에 있습니다 . 5 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 5a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여기에서 생각하라 [ mnhmoneuvw / 므네모뉴오 3421] 는 말은 ' 기억을 더듬다 ', ' 회상하다 ' 는 뜻입니다 . 앞만 보고 쉬지 않고 달려가던 것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 진짜로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 그리고 다시 돌아서야 합니다 . 회개하라 [ metanoevw / 메타노에오 3340] 는 말 역시 원론적으로는 ‘ 생각하다 ’, ‘ 재고하다 ’ 는 뜻입니다 . 여기에서 진심으로 잘못된 과거에서 돌아서 마음을 더 좋게 바꿀 수 있습니다 . ‘ 처음 행위를 가지라 ’ 에서 가지라 [ poievw / 포이에오 4160] 는 만들다 , 바르게 행동하다는 뜻입니다 . 거듭 거듭 다시 생각하고 잘못한 된 것에서 돌아서 처음 가졌던 사랑을 다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 주님의 사랑 받은 자로써 어디에 서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 혹시라도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고쳐야 합니다 .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 정리할 세 번째 내용입니다 .

3. 주님께서 원하시는 처음 행위를 가져 야 합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 언제나 기억나는 복음성가가 있었습니다 . 그것은 ‘ 죄악의 사슬에서 ’( 배성현 詞 , 서해원 曲 ) 입니다 .

“ 죄악의 사슬에서 괴로움의 눈물 흘릴 때 ” 는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삶입니다 .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영생을 약속하시는 것이 ‘ 처음 사랑 ’ 입니다 .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을 돌아봅니다 . “ 첫사랑의 뜨거움이 식어져서 눈물 흘릴 때 ” 는 너무 바쁘게 살다가 문득 돌아보니 껍질만 남아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 정말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했는데 , 알맹이가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첫 사랑의 뜨거움이 식어진 것을 발견하고 눈물 흘려야 합니다 . 이 문제는 그 어떤 다른 것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 그 사랑을 실천하는 감격만이 영적 공허감을 메워줍니다 .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 눅 11:42)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십일조를 드리는 종교생활을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 공의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신앙생활을 잃어버린 것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그릇이 넓어져야 합니다 . 하늘도 보고 땅도 보아야 합니다 . 열심히 살아가되 가끔은 눈을 들어 하늘도 보아야 합니다 .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 정말로 다시 생각하여야 합니다 . 무엇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 무엇이 정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인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 그리고 다시 돌아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 사랑 , 사랑 ,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베소교회에 주시는 말씀의 결론은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 입니다 . 우리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까 ? 청각이 약해서 소리를 듣지 못하시는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영적인 귀가 열려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

무엇이 어디에서 문제인가를 스스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 몸부림치면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 그리고 반드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 이것만이 각 사람이 또한 온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

촛대는 무엇입니까?

일곱 별의 비밀이란 무엇인가

 ​ 여기 질의응답은 계시록 10장 2절의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있는 힘센 다른 천사(미카엘 천사장 )을 통해 받은 해석에 따라 답을 드립니다.

(질문 1)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 손에 들고 있는 일곱별은 비밀이며,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일곱별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계 1장 20절)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대답) 일곱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하나의 의미는 계시록 1장 20절 말씀대로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를 뜻합니다.

2) 두 번째 의미는 일곱별의 비밀에 속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곱별이란 21세기에 인 가진 천사와 함께 추수사역에 전념하며 충성하는 주의 종들로서 장차 하늘나라에서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가는 하늘의 장로 일곱 명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6절에 보면, “그(인자 같은 이=미카엘)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자 같은 이” 인 “미가엘 천사장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다” 고 말한 것이며, 이 말은 장차 미가엘 천사장이 일곱별과 함께 추수사역을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미가엘 천사장은 마태복음 13장 36-43절에 예언한 대로 인 가진 천사와 함께 추수사역을 할 것이며, 이때 주님께서 미카엘을 통하여 세운 일곱 별들과 함께 추수사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하늘 보좌 가까이에서 사역하는 24 장로들이 있으나, 현재까지 12명의 장로만 세웠으며, 아직 12명의 장로들은 공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공석중인 12명의 장로들은 주님께서 미카엘을 보내어 21세기에 세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21세기에 있을 추수 사역 때에 하나님의 인침 받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 중에서 하늘의 24장로의 반열에 들어가는 12명의 장로들을 선택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이 12명의 하늘의 장로 중에서 일곱 명의 일곱별을 세울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 와있는 미카엘 천사장은 하늘의 24장로급에 들어갈 12명 장로들의 후보 명단을 가지고 와 있습니다.

12명의 장로급에 들어가는 후보일지라도 현재 한국에서 시작한 천사들의 추수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늘의 24장로가 되지 못합니다.

계시록 1장 20절에서 주님의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 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21세기에 하나님의 인침 받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 중에서 하늘의 24장로급 12명을 뽑고, 그 중에서 추수사역에 전념할 7명을 선택하여 일곱별로 세운 다는 것, 일곱별이 미가엘 천사장과 함께 추수 사역을 한다는 것은 모두 하늘의 비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기멀전 오프모임

기멀전 회원님, 안녕하세요. 코로나로 교회의 사역 현장에서 방송과 멀티미디어 운영의 환경이 급격히 변화.

성전과 금촛대 (출 25: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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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과 금촛대 (출 25:31~40)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입니다. 또 하나는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심은 성막에 임재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 40년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성막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막에 대한 그림 몇 개를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명령하신 성막의 전체 모형입니다.
(그림1) 성막 주위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게 하셨습니다. 성막의 성소 부분입니다.
(그림2) 이 성소를 만들 때는 네 겹으로 덮게 했습니다.
(그림3) 출애굽기 26장에 보면 처음에는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정교하게 수를 놓은 휘장으로 덮었습니다. 두 번째는 염소의 털로 짠 휘장으로 덮었습니다. 세 번째는 수양의 가죽으로 만들어 덮었습니다. 네 번째는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 덮었습니다.

성소의 구조를 옆에서 보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었습니다.
(그림4) 성소와 지성소 사이는 휘장으로 나뉘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법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에는 금촛대와 분향단, 그리고 진설병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성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소 안에 이 네 가지를 놓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네 가지의 성물에는 매우 귀중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구약에 나오는 성막에 나오는 네 가지 성물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를 지난 주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에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신약 267면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은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니 우리의 몸은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우리의 몸과 삶이 거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성소 안에 두라고 명령하신 네 가지의 성물 즉, 법궤, 금촛대, 분향단, 진설병이 우리 생활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의 삶을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금촛대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금촛대를 만들어 성막에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촛대를 순금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시고 모양까지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금촛대의 모양을 설명하시는데 그 말씀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31절부터 37절입니다.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이 있게 하고 저쪽 자기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금촛대가 어떤 모양인지를 사진을 통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금촛대를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양에 따라 한 달란트의 금덩어리를 이리 치고 저리 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양을 따라 금촛대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곳은 두드려 폈습니다. 어느 곳은 두드려 동그랗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부분은 들어가게 만들고 어느 부분은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금촛대를 만드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변화되는 사람들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들을 이렇게 치고, 저렇게 치셔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새롭게 변화되는 우리들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촛대는 무엇입니까?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막은 네 겹으로 덮혔습니다. 네 겹으로 덮었다는 것은 성소 안에 밖으로부터 빛이 전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했다는 말입니다. 성소 안은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성소는 세상의 빛으로는 밝힐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뜻은 세상의 어느 빛으로도 밝힐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등불 즉 하나님의 말씀만을 통해서 밝힐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운 성막에 금촛대를 만들어 세워 빛을 밝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은 세상의 그 어떤 빛으로도 밝게 비췰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만이 밝게 비췰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빛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한번 읽어봅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빛, 즉 착한 행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과 우리교회가 성소에 세워진 금촛대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듬어지고 세워져서 하나님을 닮은 우리의 선한 마음과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 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소에 있는 금촛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촛대 등잔의 불을 밝히는 연료인 감람유입니다. 감람유에는 여러 등급의 감람유가 있습니다. 등급이 낮을수록 그으름과 매캐한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최고의 등급인 감람유는 타면서 감람유 특유의 향기를 풍깁니다.

하나님은 밀폐된 성소의 금촛대의 등잔을 밝히기 위해 감람유를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순전한 감람유를 사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 27장 20-21절에 보면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순전한 감람유를 항상 채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 스가랴서 4장에 보면 성소에 있는 금촛대와 관련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고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원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성전 재건을 위해 애를 쓰며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환상 가운데 하나가 금촛대 환상입니다.

스가랴가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는데 금촛대가 보이고 그 양 옆에 감람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스가랴가 하나님께 ‘주여, 이 두 그루의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스가랴는 ‘예,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금촛대의 환상은 성전의 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재건이 사람의 힘으로,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촛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금촛대 좌우에 있는 감람나무는 금촛대의 등불을 밝히는 감람유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 순수한 감람유라면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에 빛을 비취게 하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게 영광 돌리게 하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과 왕, 그리고 선지자를 세우실 때 머리에 감람유를 부으시며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감람유를 머리에 붓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폭발적인 복음의 역사는 제자들의 열정과 다짐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신 후에 복음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신약에서 성령님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가 명령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하라’ 등 성령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금촛대의 등불은 일곱 개입니다. 촛대의 기둥을 중심으로 좌우에 세 개씩을 세웠습니다. 기둥이 되는 촛대를 빼면 여섯 개입니다. 성경에서 6의 숫자는 사람의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 째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입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은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을 중심으로 세워질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주시는 능력을 덧입을 때입니다. 기둥이 되는 촛대를 통해 공급하는 감람유가 있을 때 금촛대는 등불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금촛대를 자신의 지식, 재물, 명예, 사회적 직위, 건강을 가지고 태우는 사람은 그으름이 납니다. 매캐한 악취가 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으로 금촛대를 태우는 사람은 예수님의 향기를 풍깁니다. 어두운 세상의 빛이됩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사모하라. 성령은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세워져야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능력 있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처럼 성령님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성령께서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금촛대의 등불을 밝혀 주위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1-7 (05/29/2022)

얼마전에도 찬양교회 허봉기 목사님께서 보내 주신 책 내용을 소개해드렸는데 오늘도 허 목사님의 이야기 하나를 먼저 나눕니다.

허 목사님께서 미국 첫 목회는 텍사스 주의 외딴 소도시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이제 그 교회를 떠나고 뉴져지에 있는 찬양 교회에서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새로운 임지에 가게 되었는데 조언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

허 목사님은 액면 그대로 받지를 않고 이렇게 받아 드립니다.

‘나는 그 말을 이단적으로 되라는 말로 받았다. 자칫 이단 소리를 들을 만큼 과격하게 개성적인 교회가 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허 목사님이 그후 목회를 잘 하셨습니다. 종종 연장 교육시 만나서 말씀을 들으면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혁신적인 아니 이단적으로 목회를 하시는 것을 들을수 있었습니다. 물론 좋은 결과를 거두었구요.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모든 목사님들은 ‘아무나 저렇게 하지 못하지, 허 목사니깐 하지…’라는 멘트를 나누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단적으로 목회를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실 기독교의 시작은 이단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이 당시로는 혁신적이고 이단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는 늘 이단적으로 보이는 목회가 참 목회일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한 마디로 조언을 하셨다면 아마 허 목사님이 받은 조언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이는 오늘 본문 말씀 첫번째 말씀을 통해도 재확인이 됩니다. 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모습을 다시 떠오르게 하십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상기시키십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이 당시로는 이단적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메시야로 여기는 것이 이단적입니다. 아울러 더 이단적인 것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이 당시 믿는 자들에게는 촛대하면 일곱 촛대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성소의 촛대였습니다. 이 성소의 촛대는 가운데가 구멍이 뚫려져 있고 그 구멍을 통해서 기름이 공급이 되어서 모든 일곱개의 촛대가 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새로운 촛대를 보여 주십니다. 일곱 촛대가 떨어져 있습니다. 연결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지난번에 이미 나누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는 것을….

유대교적으로는 이는 상상도 할수 없는 것입니다. 이 당시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 회당를 마치 하나의 촛대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 회당이 교회 보다 훨씬 자리를 잡고 건재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 교회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곱 교회가 일곱 촛대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회당이 촛대라고 해도 이단적인데 교회가 촛대라니…!

그러면 일곱 촛대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어떤 대단한 교회들이기에 주님께서 촛대로 삼으시고 멧세지를 전해 주시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제일 먼저 촛대 중에 하나인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2, 3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예, 정말로 촛대가 될만한 교회임을 금방 느낄수 있습니다. 사실 이 당시 에베소는 상업뿐 아니라 학문도 앞서 갔던 곳으로 유명한 두란노 서원이라는 도서관도 있었던 곳입니다.

물론 유명한 아데미 신전이 있는 우상을 아주 제대로 섬겼던 도시입니다.

이런 곳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는 신앙 생활을 해서 주님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로 촛대가 될만한 교회임을 재삼 확인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보면 회당보다는 못한 가정 교회라고 할지라도 촛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에베소 교인들은 스스로 자기네들은 촛대가 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은근히 자부심도 생겼을줄 압니다. 첫번째 촛대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큰 기대를 안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청천벽력입니다. 아니 자기들을 성소의 첫번째 촛대로 비유하실 때는 언제이고 갑자기 책망을 하십니다. 급소를 찌르십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잊은 교회라고…. 교회에게 주는 가장 아픈 비난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는 교회라는 비판 아닙니까? 큰 혼동이 옵니다.

‘어떻게 촛대라고 하시더니 이런 책망을 하실까? 그리고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가 촛대가 될수 있는가?’

사실 에베소 교인들은 자기들의 행위 때문에 촛대가 되었었다고 잠시라도 자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첫 사랑을 잃은 자들입니다. 이런 혼동 가운데 있는데 주님은 계속 촛대는 무엇입니까?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제 문득 놀라운 깨달음이 옵니다. 첫 사랑을 잃어 버린 교회를 주님께서는 계속 촛대로 삼고 계신 것임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촛대들 사이를 거닐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자기들의 행위로 인해서 자기들이 촛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촛대로 삼으셨는데 잘못 하나로 촛대를 쉽게 옮기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잘못이라도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십니다. 그 이유는 촛대가 되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있다면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뿐일줄 압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하는 것이 제일 합당한 해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니 얼마전 본 북한에서 내려 온 탈북자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북한 공안부 요원들이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 한 가지 묘책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의 특징은 물건을 이웃에게 잘 나누는 사람들임은 공안부 요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늘 자기의 것을 이웃과 나누곤 했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안부 직원이 찾아 왔습니다. 이에 할아버지가 답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에베소 교인들도 이런 사랑의 공동체였는데 언제 부터는 이런 사랑을 나누는 습관이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 중 하나가 6절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의 특징은 그들은 이단이고 이들의 신학은 영적인 세계가 중요하고, 보이는 육적인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곧 예수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육신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은 교회사 가운데 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신학적으로는 뚜렷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잘 구분하였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을 미워했습니다. 이런 통찰력은 뛰어났지만 어느덧 잃어 버린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신학적인 통찰력이 뛰어날수록 어느덧 사랑을 잃어 버리게 되어 있을까요? 교회는 신학적인 통찰력도 뛰어나야 하고 이웃 사랑도 항상 넘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으로 항상 조화를 이루어야 참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언제 이 둘의 조화가 깨지기 시작할까요? 저는 마지막 7절에서 실마리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이 마지막 절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모든 멧세지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작은 동일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곧 에베소 교회에 주시는 이 말씀은 실은 모든 교회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여섯 교회 교인들도 함께 들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여섯 교회에 주시는 말씀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곧 일곱 교회는 일곱 교회이자 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일곱 촛대 사이에 거니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일곱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잊을 때 아무리 신학적 통찰력이 깊어도 첫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요한계시록을 강해설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곱 교회에 대한 주석도 많이 다릅니다. 어떤 주석가는 일곱 교회는 앞으로 오는 세대의 교회의 모습을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주님만 아신다고 답할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한편 저는 지난번 언급해 드린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관점으로 일곱 교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터슨 목사님은 일곱 교회는 그 당시의 일곱 교회의 문제를 차례로 다룬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저도 그 분의 생각에 공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위치를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힌다고 생각됩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로 이어지는 일곱 교회의 위치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 가면서 위치하고 있습니다.

곧 요한은 에베소를 기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한 교회 씩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 교회의 현 주소를 차례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요한이 일곱 교회의 위치 순서로 멧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요한은 이 편지를 모든 일곱 교회 교인들이 읽고 일곱 교회 교인들이 서로의 모습을 알고 서로가 이미 하나의 교회임을 고백하길 원했다고 생각됩니다.

곧 에베소 교인들은 처음에는 자기 교회뿐 아니라 나머지 여섯 교회도 하나의 교회로 믿고 서로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본주의에 물들면서 어느덧 자기 교회밖에 모르는 교회 내지 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오늘 현대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허봉기 목사님에게 충고하신 분이 “이단이 되라”고 하셨는데,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기 교회만 생각하는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늘날 이단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습니다.

오래전 교회로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당신 교회를 소개하는 소책자가 보내왔습니다. 메일을 열어 보니 큰 글자가 아직도 눈에 선명합니다.

내용인즉슨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로 그 교회가 되는 것이 참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귀 교회의 목회 방침을 소개한 책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 소책자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아마 조금 제목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왜 에베소 교회를 제일 먼저 쓰셨나? 에베소 교회는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했습니다. 전통도 그렇고 신학적 견해도 그렇고 그리고 한 동안 일곱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일곱 교회가 한 교회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어느덧 시간이 지나며 자기 교회 중심이 되어 갔습니다. 이웃 교회를 위한 사역이 멈췄습니다. 첫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책망하며 그것도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에 유진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교회론을 정리합니다.

“The only way from Christ to heaven and the battles against sin is through the church. And not just one church, but seven!”

(그리스도에서 천국으로, 또한 죄와의 승리로 가는 길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 교회가 아니라 일곱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아니라 ‘바로 그 일곱 교회.’

요즘 많은 교회들이 ‘바로 그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일곱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당연한데 어느덧 이를 추구하는 교회는 이단적 교회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일곱 교회는 2000년 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눈에 띄는 우리 주변의 교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그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일곱 교회’에 속한 한 교회입니다.

지난번 한울타리에 소개한 이 지역에 함께 거주하는 유희주 시인이 쓴 ‘새로 들어선 길목’이란 글의 한 문장을 다시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오십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오십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오십 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오십 명이 함께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반으로 나뉘었으나

옆길에서 들어온 이들 때문에 오십 명이 함께 걷고 있네.”

시인은 그동안의 인생 여정에서 4 번 공동체를 떠나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항상 새로운 공동체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몇 번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보스톤 한인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신앙 생활할 때와 모든 것은 같습니다. 한 교회에 속한 교인입니다.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일곱 교회가 바뀐 것입니다. 타주에서 오신 분들도 모든 것은 같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일곱 교회가 바뀐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일곱 공동체 안에 있는 한 공동체임을 인정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일곱 공동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상세히 나누게 될 것입니다. 저희 보스톤 한인 교회는 일곱 공동체 안에 있는 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이 놀라운 공동체를 잊지 마십시다. 우리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통찰력과 함께 처음 사랑을 잃지 않는 주님의 촛대가 되어 세상 가운데 빛을 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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